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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적 알미니안을 한번 만나볼까?
by Jeff Robinson
2020-11-19
매트 핀슨(Matt Pinson)이 강연에서 여러 번 쓴 용어 하나가 며칠 동안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건 “개혁적 알미니안”이었다. 마치 점보 새우, 가열된 얼음 또는 좌파 보수주의처럼 이 말은 모순적으로 들린다. 매트 핀슨이 “개혁적 알미니안”이라고 말했을 때, 나름 훈련받은 교회 역사가로서 나는 그가 개신교 종교 개혁에서 나온 여러 인물 중 한 사람인 야곱 아르미니우스(Jacob Arminius)의 가르침을 긍정하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아르니미우스의 신학은 오늘날 나름 인기를 얻고 있는 현대 알미니안 신학과는 여러 면에서 많이 다르다. 이런 내 추측이 맞는 걸까? 나는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고, 아래 인터뷰는 내가 매트 핀슨에게 던진 질문의 결과이다. 내슈빌에 있는 웰치 대학(Welch College, 자유의지 침례교)의 총장인 핀슨은 예일대 신학 과정(Yale Divinity School)을 졸업했으며 벤더빌트 대학(Vanderbilt University)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Perspectives on Christian Worship’, ‘Four Views on Eternal Security’,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Arminian and Baptist: Explorations in a Theological Tradition’을 포함한 수많은 책의 저자 또는 편집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현대 아르미니우스의 교리와 오리지널 아르미니우스의 교리 등을 대조하면서 어떻게 같은 사람이 동시에 개혁주의면서 알미니안이 될 수 있는지를 토론했다. “개혁적 알미니안”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가?점점 더 많은 알미니안이 “개혁적 알미니안주의”로 알려지고 있는, 비 웨슬리적(non-Wesleyan)인 다양한 알미니안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다. 미국에서 이 운동의 주류는 자유 의지 침례교 교단(Free Will Baptist denomination)에서 발견되며, 그 기원은 17세기 영국 일반 침례교 운동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런 접근을 지지했던 초기 신학자 중에는 토마스 헬위스(Thomas Helwys) 및 토마스 그랜썸(Thomas Grantham)과 같은 17세기 영국인이 있다. 20세기 들어서 이런 입장을 지지한 사람으로는 자유 의지 침례교 신학자인 르로이 포린스(Leroy Forlines)와 로버트 피키릴리 (Robert Picirilli)가 있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대부분의 현대 아르미니우스주의보다 좀 더 정통 아르미니우스 신학에 가까운 알미니안주의를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포린스와 피키릴리는 토마스 오덴(Thomas Oden)과 같은 일반/자유 의지 침례교 전통을 벗어난 학자들과도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늘어가는 복음주의자는 칼빈주의-알미니안 사이의 토론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쉽게 말해 개혁적 알미니안은 성경이 예정, 은총, 자유 의지에 관한 전통적인 칼빈주의적 견해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대부분의 알미니안이 거부하는 개혁주의의 전통 교리인 전적 타락, 형벌적 대속, 칭의에 필요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그리고 (전적이 아닌) 점진적 성화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이와 비슷한 의견을 가진 개인들에게 또 전반적인 칼빈주의-알미니안주의 간의 대화에 있어서도 개혁적 알미니안이 가진 이런 사상의 흐름은 여러 유익한 가능성을 제공한다. 개혁주의 복음주의자 대부분이 아르미니우스의 글을 별로 읽은 적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의 글을 좀 더 접하게 된다면 알미니안주의에 대한 우리의 견해도 바뀔까? 대부분의 알미니안 복음주의자들이 칼빈의 글에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대부분의 칼빈주의 복음주의자들도 아르미니우스의 글을 거의 읽지 않는다. 이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인데, 기독교 역사에서 항상 이랬던 건 아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공동체에는 과거에 비해서 훨씬 더 많은 편협함이 있는 것 같다. 기존에 고수하는 구원론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만 간다. 내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 구속, 성화, 기독교 세계관, 변증론과 인식론, 문화적 참여, 종말론 등과 관련하여(심지어 세례와 성령의 은사와 관련한 부분까지도) 일부 칼빈주의자들과 실로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 그럼에도 내가 가진 이런 모든 공통점은 단지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종종 무시되는데, 그건 내가 칼빈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나는 무조건적 선택을 믿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하지만 칼빈주의자만 이런 식인 건 아니다. 알미니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유아 세례,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 및 성령의 은사와 관련해선 서로 간에 아무리 다른 의견을 가지도 있더라도 같은 알미니안끼리는 서로 협력할 수 있다. 그건 칼빈주의자끼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알미니안과 칼빈주의자 사이에서는 그런 협력이 거의 불가능하다. 달리 말해서, 여전히 칼빈주의자냐 아니면 알미니안이냐라는 편가르기는 같은 서클 안에서 복음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는가 아닌가를 가름하는 하나의 리트머스 시험지라는 의미이다. 이런 상황이야 말로 피차 상대편의 신학을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고 상대편 신학을 피력한 책을 읽는 것을 방해하는 원인이 되는데, 이는 실로 건강하지 않은 현실이다. 아르미니우스의 글을 통해서 칼빈주의자가 만나게 될 사람은 다름 아니라 그들이 항상 읽고 인용하는 기존의 칼빈주의 책을 쓴 저자들과 매우 흡사한, 복음을 향한 뜨거운 심장 박동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애초에 상상했던 것과는 아주 많이 다른, 칼빈주의자가 가진 영성 및 교리적 신념과 별반 다르지 않은 한 인물을 만나게 될 것이다. 달리 말해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구원이 불가능한 전적 타락한 인간, 오로지 믿음만으로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로 의롭다함을 받는 구원, 그리스도의 대속적 형벌의 의미, 신자가 어떻게 은혜 안에서 성장하고 성화되는지, 율법주의 대 율법폐기론 등등에 관해서 칼빈주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신학을 만나게 될 것이다. 티모시 조지(Timothy George)는 최근 내가 쓴 책 ‘알미니안과 세례자(Arminian and Baptist)’에 대해 평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칼빈주의자들은 개혁주의 알미니안을 통해서 ‘있는지도 몰랐던 사촌들’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아르미니우스를 읽게만 된다면, 대부분의 칼빈주의자들은 비록 그가 예정 및 그와 관련한 교리에서 좀 더 칼빈에 가깝길 바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에 가졌던 선입관을 깨도록 만드는 완전히 새로운 아르미니우스를 발견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교수님이 속한 대학은 자유 의지 침례교 계통인데, 그 교단의 중요 특징이라면 어떤 것이 있는가?역사적으로, 지금까지 강조한 사항에 첨부해서, 자유 의지 침례교는 교회와 관련한 교리에서 대부분의 다른 침례교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회의나 협회를 진행할 때 지역 교회 간의 상호 의존성 강화, 침례를 받지 않은 신자들과도 성찬을 나누는 것(물론 정식 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침례가 의무이다), 병자에게 기름바름과 같은 보다 다양한 전례 의식, 성도들의 발을 씻기고 (요즘보다는 과거에 주로 더 행해졌지만) 새로 침례받은 신자에게 기존 신자들이 손을 얹고 기도하는 행위 등등을 한다. 하지만 칼빈주의 친구들에게 말하고 싶은 건, 이런 의식이 비록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처음에는 이상하게 보일 지 몰라도, 그렇게까지 이상한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실, 이런 의식은 개신교, 가톨릭, 동방 정교회 등 대부분의 교단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웨슬리 계통 알미니안 신학과 개혁적 알미니안 신학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개혁적 알미니안 구원론은 보다 더 광범위하게 개혁주의 범주를 수용했다는 점에서 웨슬리 및 성결 모델(Wesleyan and Holiness models)과는 다르다. 성결 운동에서 발전한 웨슬리식 알미니안 신학과는 달리, 개혁적 알미니안주의는 성령님의 강권하심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만이 인간의 원죄와 급진적 타락을 이겨낼 수 있다는 전통적인 개혁주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입장은 속죄에 대한 철저한 개혁주의 및 형벌 대속을 통한 구원이라는 관점을 제시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능동적이며 또 동시에 수동적인 순종이 칭의를 통해 신자에게 전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혁주의 알미니안인들은 대부분의 알미니안주의가 지향하는 완전주의, 완전 성화, 그리고 위기 경험 지향이라는 점에서 많이 다르다. 그들은 또한 기독교인들이 오로지 믿음을 바탕으로 한 인내를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다.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단번에 이루어진 구원에서 배도할 수도 있고, 그 결과 구원을 잃고 다시는 회복할 수 없게 되지만, 이런 배도도 오로지 믿음을 저버릴 때에만 발생한다고 믿는다. 이런 관점은 구원의 확신에 대한 실질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배도에 관한 개혁적 알미니안의 개념은 개개인이 개별적인 죄를 지음으로써 은혜에서 반복적으로 떨어질 수 있고, 또 동시에 회개를 통해 반복적으로 은혜의 상태로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웨슬리적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나는 개혁적 알미니안주의가 현재의 알미니안-칼빈주의 사이의 대화(또는 대화의 부족)를 다시 활성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개혁적 알미니안주의는 속죄, 칭의, 성화, 영성의 본질에 대한 개혁주의 가르침이 가진 은혜 지향적 입장을 지지하는 동시에, 거기에 신성한 구원의 은혜에 저항하는 예정과 (개종 전후의) 자유에 대한 알미니안의 입장을 결합한 것이다. 그것은 아르미니우스의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또한 은혜를 붙잡고 있는 독특한 알미니안주의를 제공한다. 훨씬 대중적인 수준의 복음주의적 알미니안주의가 정작 아르미니우스보다 오히려 웨슬리나 성결 운동의 믿음을 더 많이 반영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지? 불행하게도 그렇다. 가장 인기있는 알미니안주의는 사실상 웨슬리보다 피니(Finney)에 더 가까운 준 펠라기안(semi-Pelagian)이다. 이제 웨슬리는 오히려 우리보다도 더 개혁주의 신학에서 멀어졌지만, 아무리 그래도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발전한 피니와 성결 운동만큼 멀어진 건 아니다. 웨슬리는 완전한 형벌 대속과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된다는 교리를 거부했다. 그는 신자들이 회개를 하지 않을 때 반복해서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성화와 영성에 대한 그의 견해는 보다 더 위기 경험과 완전성에 대한 것이었다. 내 생각에 웨슬리는 율법폐기론에 반발했기 때문에 율법주의로 방향이 바뀐 거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후기의 피니보다는 훨씬 더 개혁주의자와 비슷했다. 특히 원죄에 대한 그의 신학은 그로 하여금 매우 중요한 방식으로 펠라기안주의에 반대하도록 만들었다. 칼빈이 사랑하고 즐겨 불렀던 복음으로 풍부한 찰스 웨슬리의 찬송가를 생각할 때, 그 어떤 칼빈주의자라고 해도 “나는 사실 칼빈주의자와 별반 다른 게 없다”라고 말한 웨슬리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웨슬리의 신학과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알미니안주의 속에 숨은 개혁주의 요소를 찾아내는 나의 연구 경향 때문에 종종 사람들은 내가 웨슬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나는 칼빈을 사랑하는 만큼 웨슬리를 사랑한다. 나는 이 두 사람의 얼굴이 담긴 큰 액자 두 개를 사무실에 나란히 걸어놓을 생각이다.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웨슬리의 신학적 오류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했다. “칼빈과 웨슬리의 잘못을 발견했을 때가 아니라 우리 속에서 고쳐야 할 잘못을 찾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칼빈과 웨슬리도 틀릴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더 큰 경건함, 더 뜨거운 불, 더 넘치는 은혜, 더 불타는 사랑, 더 강렬한 이타심을 가질 때, 우리는 비로소 칼빈과 웨슬리의 결점을 찾고 비판도 할 수 있게 될 겁니다. … 내 경우를 말하자면, 태양 속의 반점을 보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게 여전히 태양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태양 앞에서 내가 들고 있는 것은 고작해야 초라한 촛불이라는 사실에 흐느낄 뿐입니다.” 교수님은 칼빈주의적 개혁주의 전통에 근거한 동시대 및 고전 작가와 신학자의 책을 많이 읽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그런 책을 좋아하는가? 나는 칼빈, 오웬(Owen), 번연(Bunyan), 에드워즈(Edwards), 호지(Hodge), 스펄전(Spurgeon), 카이퍼(Kuyper)와 같은 역사적인 칼빈주의자들의 책을 좋아하는 것처럼, JI 패커(JI Packer), 칼 헨러(Carl FH Henry), 티모시 조지(Timothy George), 러셀 무어(Russell Moore), 마이클 헤이킨(Michael Haykin), 마크 데버(Mark Dever), 해리 리더(Harry Reeder), 데이비드 도커리(David Dockery), 리곤 던컨(Ligon Duncan), 알 몰러(Al Mohler), 로날드 내쉬(Ronald Nash), 칼 트루먼(Carl Trueman), 나단 핀(Nathan Finn), 번 포이트레스(Vern Poythress, 나는 현재 그의 책 ‘그리스도의 주되심’The Lordship of Christ을 읽고 있다), 필립 젠슨(Phillip Jensen) … 등등 어디에서 멈춰야 할 지 모를 정도로 현대 칼빈주의자의 책을 읽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역사적인 개신교 정교회의 풍부한 유산을 소중히 여기며, 속죄받고 성화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개혁적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풍부한 복음주의적 영성을 찬양하며, 오늘날도 교회에서 은혜만을 통한 구원으로 충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개혁주의 인식론/변증법을 가르치고, 잘 짜여진 기독교 세계관과 그 세계관에 참여하는 문화의 중요성을 믿을 뿐 아니라 땅 끝까지 이르러 제자를 삼으라는 그리스도가 주신 큰 사명에 인생을 헌신하고 있다.개혁 교회 목사들이 읽어야 할 알미니안 목사들과 신학자들은 누가 있을까?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알미니안 신학과 단지 그 신학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된 자들에 향해서 불공정한 풍자 만화를 그리는 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개혁주의 목사들이 읽어야 할 건실한 알미니안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적지 않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몇 명만을 인용하자면, 르로이 포린스, 로버트 피키릴리, 스티븐 애쉬비(Stephen Ashby, 개혁적 알미니안)을 들겠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현존하는 웨슬리안 작가인 아지츠 페르난도(Ajith Fernando), 토마스 오딘(Thomas Oden), 로버트 콜먼(Robert Coleman), 티모시 테넌트(Timothy Tennent)를 빼놓을 수는 없다. 이 사람들은 모두 위에서 언급한 칼빈주의 저자들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현대 작가들 뿐 아니라 아르미니우스 자신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적 알미니안 저자들의 책을 읽는 것이야말로 칼빈주의자들이 알미니안주의에 대한 불공정한 풍자 만화를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원제: Meet a Reformed Arminia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신학
교리
개혁적알미니안
아르미니우스
칼빈주의
존웨슬리
찰스스펄전
존칼빈
알미니즘
준펠라기안
복음, 정말로 궁금한 것에 답하게 하라
by Tim Keller
2020-11-13
언젠가 나의 선생님 한 분이 학계 저명인사인 독일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셨다. 젊은 시절, 그가 신학교 교수로 근무할 때에 틸리히의 공개 강의 후 토론 진행을 맡았다고 한다. 학생들이 질문을 시작하자, 초청 강사인 틸리히는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번번이 학생들의 질문을 재구성하고 수정하는 것이었다.그는 결국 용기를 내어 “틸리히 교수님, 그것은 그 학생의 질문이 아닙니다. 학생들이 실제로 질문하는 내용에 대해 답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요청했다. 틸리히는 즉각적이고도 단호히 “아니요. 그들이 제대로 된 질문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말이 부분적으로 맞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런 식의 대응은 학생들이 틸리히를 완전히 배척하고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예수가 답이다, 그런데 질문이 무엇이었더라?댄 스트레인지(Dan Strange)는 그의 책 ‘복음과 문화사이 ’(Plugged In: Connecting Your Faith with What You Watch, Read, and Play, 두란노)에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위에 예로 든 틸리히와 같이 전혀 현실적이지 못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우리는 ‘예수가 답’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문화의 영향에는 귀를 막고 있어서 때론 사람들이 묻지도 않은 것을 대답하기도 한다. 물론 인간은 죄로 오염되어 있기에 ‘죄인 된 내가 어떻게 거룩하고 공의로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지낼 수 있을까?’라는 가장 궁극적인 질문을 하지는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댄 스트레인지가 이 책에서 보여주듯,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반 은총을 통하여 ‘나는 누구인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진정한 기쁨과 성취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라는 제법 근본적인 질문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모든 문화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을 바탕으로 다양한 형태의 ‘매체’(보고, 읽고, 재생할 수 있는)를 쏟아 낸다. 댄 스트레인지는 내가 본 가장 쉬운 접근 방식으로 기독교적인 문화 분석 수행 방법을 제시한다. 그는 우리에게 위와 같은 질문에 대해 다양한 매체로 이루어진 문화 속에서 특정 답변을 구분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그다음, 그런 답변에 대해 비평하되 기본적인 그들의 열망을 확인하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궁금증을 해소한다.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질문에 대해 진정한 해답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예수께 인도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보여준다.전복적 성취*여기에서 사용된 방법은 20세기 선교학자들에 의해 체계화된 것이다. “전복적 성취”라는 명칭은 그 접근법을 완벽하게 설명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복음이 기본적인 인간의 갈망과 열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다른 종교나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동시에 그들이 가진 갈급함을 해소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거짓 우상에 대하여 지적하고 비평하여야 한다. 전복적 성취는 종교 다원주의 또는 종교 무관심 주의가 보이는 오류도 피해 나간다. 죄를 일반적인 비난의 대상으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문화 가운데에 나타날 수 있는 우상의 형태와 연관 지어 다룬다. 구원은 그냥 선포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 속에서 우상을 향해 만족을 얻고자 하는 바를 대체할 수 있는 구체적 희망을 제시하여 줄 수 있어야 한다.댄 스트레인지는 이러한 방법을 21세기로 가져옴으로 독자들이 잘 적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것은 바울이 성경에서 보여준 방식이라는 것을 그는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그러나 이 접근법은 단순히 복음주의적인 대화를 위한 전략만은 아니다. (확실히 복음 중심적인 대화의 전략이기도 하겠지만….) 댄은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세상에서 매일 생성되는 다양한 형태의 문화와 매체들을 이해함으로써 세상을 위해 충실하게 사는 것이 아닌 세상 안에서 충실하게 사는 방법을 보여준다.더욱이 그는 설교와 교육, 제자 훈련 및 대화 등 우리의 모든 의사소통을 포함하는 접근 방식에서도 널리 적용할 수 있는 ‘전복적 성취’를 촉구하고 있다. 그것은 결코 “나는 절대적으로 옳고 당신은 완전히 틀렸다”라고 말하며 사람들에게 상처 주라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얼마나 현대적이며 우월한 종교인지를 보여주라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긍정적인 인정과 반박을 모두 포함한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문제점을 제시하면서 그들의 일반적인 노력이 실패하였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인정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경험하는 고난의 의미, 주변 환경에 영향받지 않는 만족감, 사랑과 공동체를 훼손하지 않는 자유, 스스로 벗어나 망가지거나 배타적이지 않고 자신을 세우는 정체성, 올바른 정의에 대한 생각, 수치심과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 죽음까지도 담대히 받아들일 수 있는 희망 등에 관한 것을 복음적 용어로 설명하는 것을 의미한다.우리 주위에는 세속적이고 다양한 생각이 존재하는 현대 사회에서 복음 선포를 대중이 필요로 하는 것이나 그들의 질문과 연결하도록 제안하는 책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기독교 이후의 서구 문화에서 그저 도피자로 살든지 아니면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충실하게 살 수 있도록 알려 주는 책들도 있다. 이 책, ‘복음과 문화사이’는 실제로 이를 실행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는 귀한 책이다.* 팀 켈러의 저서 ‘도시를 품는 센터 처치'(Loving the City, 두란노, 오종향역)에서는 ‘Subversive Fulfillment’를 ’전복적 성취’라고 번역하고 있다. 우리 용어로 표현하기에는 다소 제약이 있는 ‘전복적 성취’란 표현은 갈망하는 바를 만족하게 하지만 전혀 다른 방법이나 생각하지 못한 대상을 통해 만족하게 하는 경우를 말한다. 복음이 비기독교인들에게는 그들의 갈망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충분히 충족시키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역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Christian, Answer Questions People Are Actually Asking번역: 장명근
복음
변증
댄스트레인지
문화
전복적성취
팀켈러
매체
그리스도의 못자국은 영원하다
by David Mathis
2020-11-02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몇몇 소중한 사실들은 다음과 같다. 그는 죽으셨을 때와 같은 몸으로 부활하셨다. 하지만 그 몸은 다시 살아난 부활체였을 뿐 아니라 변화된 몸이었다. 여전히 사람의 몸이었으나 영광스럽게 된 몸이었다. 썩을 것으로 심었으나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었다(고전 15:42). 닫힌 문과 벽도 통과할 수 있는 몸이었으나(요 20:26) 생선 같은 음식도 드실 수 있었다(눅 24:42). 갈보리에서 죽임을 당한 그의 “육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다(고전 15:44). 완전히 새롭게 된 그의 몸이었기에 그와 가장 가깝던 이들조차도 처음에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눅 24:16, 27; 요 20:14; 21:4). 하지만 머지않아 그가 실로 예수님임을 알아보았다(눅 24:31; 요 20:16, 20; 21:7).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멋진 사실 중 우리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끄는 것은 그의 못자국에 대한 것이다.내 손을 보라부활 후 변화된 몸을 입었지만 여전히 동일한 예수님 자신임을 제자들에게 확인시켜줄 때 예수님은 주로 그의 못자국을 보여주셨다. 누가는 예수께서 처음 그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눅 24:37) 라고 기록한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못자국을 보여주셨다.“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눅 24:39–40)사도 요한도 예수께서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요 20:20) 라고 기록한다. 요한은 곧이어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요 20:24) 라고 쓰면서 도마의 의심에 대해 묘사한다. 도마는 예수님의 못자국을 직접 봐야만 믿을 수 있겠노라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도마를 책망하지 않으셨고, 여드레를 기다리신 후에 도마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예수께서 마침내 다시 찾아오셨을 때 도마에게 못자국을 보여주셨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못자국 속의 보화누가나 요한이 그리스도의 못자국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영광스러운 그의 부활체에 못자국이 남아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예수님의 완전케 된, 새로운 차원의 육신에 못자국이 있다는 것은 깜짝 놀랄만한 일이다. 사실, 처음에는 못자국이라는 것이 어떤 결함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세상에서는 썩어질 몸이었으나 부활 후에는 썩지 아니할 몸으로 개선되었기에, 이 땅에서 당한 고난의 흔적이 부활체에서는 남아 있지 않으리라 기대하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 아닐까?그의 아들의 영원히 영광스럽게 된 몸에서 못자국을 없애는 것이 성부 하나님의 뜻이었을 거라 지레 짐작할 수 있겠지만, 못자국을 그대로 두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생각이었다. 하나님은 사람의 피부가 큰 상처로부터 회복된 후에는 흉터가 남도록 만드셨다. 어떤 흉터는 별 의미 없는 것일 수 있으나 어떤 흉터에는 얽힌 사연이 많을 수 있다. 어떤 상처였느냐에 따라 그 상처가 남긴 흉터는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기도 하고 우리를 수치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누가와 요한 모두 예수님의 부활체의 못자국에 대해 분명하게 증언한다는 것은 그의 못자국이 수치가 아니라 영광이라는 뜻이다. 눈으로 볼 수 있고 영광스럽기까지 한 그리스도의 못자국에 담긴 우리가 영원히 누릴 보화는 무엇일까? 그의 손과 옆구리를 보라먼저, 예수님의 못자국은 그가 우리의 고통을 알고 계시는 분임을 보여준다. 그는 완전히 인간이 되신 분이고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히 2:17)을 경험하심으로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어 우리처럼 고난을 당하시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 그의 못자국은 그가 인간의 고통을 아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목회자요 시인이었던 에드워드 쉴리토(Edward Shillito, 1872–1948)는 제1차세계대전의 참상을 경험했으나 인간이 겪는 고난이 무엇인지 잘 아시는 “못자국을 지니신 예수님” 안에서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너무도 고요한 하늘은 우리를 무섭게 하고온 우주에 우리 쉴 곳은 없네상처가 쓰라릴 때 나의 위로는 어디에 있나?못자국 지닌 예수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고난 받기로 자발적으로 선택하셨으므로 그의 못자국은 자신의 사랑,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준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찬송가 작가인 매튜 브릿지스(Matthew Bridges)는 못자국에서 그 사랑을 보았기에 1851년에 쓴 찬송시를 통해 “사랑의 주님”께 면류관을 드렸다.‘면류관 벗어서 주 앞에 드리세그 손과 몸의 상처가 영광 중 빛나네’죽임 당하신 어린 양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못자국은 이제는 아문 상처이고, 그 못자국은 예수님의 최종적 승리를 우리에게 영원히 선포한다. 요한계시록은 그의 궁극적인 승리를 보여주는데, 우리의 구주, 즉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 하늘의 중앙에 서시고,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온 우주의 보좌에 앉으신다(계 7:9–10, 17; 22:1, 3). 요한계시록에서는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계 5:6)부터 시작하여 모두 스물여덟 차례에 걸쳐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표현한다. 천국에서 찬송하는 천사들은 그 앞에 엎드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라고 선포한다. 또한 생명책은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계 13:8 및 21:27)으로 묘사된다.그의 고난과 그가 흘리신 피를 결코 잊지 않는 그의 백성들은 예수님을 죽임 당하신 어린 양으로, 못자국을 지닌 양, 그 피로 그 옷을 씻어 희게 된 어린 양으로 영원히 송축한다(계 7:14). 또한 그의 백성들은 어린 양의 여전히 선명한 못자국을 통해 흘려진 피로 우리의 대적을 이긴다(계 12:11).우리는 그의 아름다운 못자국을 보며 영원히 그를 경배할 것이다. 그의 못자국은 구속된 이들의 눈에는 결코 수치가 아니다. 이는 구원 받은 죄인들을 위한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영광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His Scars Will Never Fade: The Wounds Christ Took to Heaven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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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리 아래 사는 성도들의 올바른 태도
by 이승구
2020-11-01
온 세상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소위 믿는다는 많은 사람들은 그 정확한 함의를 다 생각하지 않고 섭리에 대해서 말하기 쉽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섭리에 대해서 말할 때 먼저 사람들이 자칫 잘못하면 빠져 들어 갈 수 있는 잘못된 태도들에 대해서 말하고, 그것을 피하면서 바르게 생각하고, 그런 바른 생각에 따라서 참으로 섭리 아래서 사는 성도들의 바른 모습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그에 따라서 우리들도 먼저 섭리에 대해서 생각할 때의 있을 수 있는 잘못된 말과 태도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섭리를 대하는 잘못된 태도들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대표적인 것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으니 하나님이 죄를 만든 분이라고 단선적으로 생각하며 말하는 일을 들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이다”(the author of sin)라고 표현한다.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자신은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 하나님은 죄를 비롯해 모든 것을 다 만드신 분임을 강조해야만 하나님의 주권을 분명히 할 수 있다고 하면서 거의 결정론이나 운명론과 비슷한 입장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외국에도 있고 우리나라에도 있어서 항상 사람들을 많이 오도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그야말로 잘못된 태도를 지닌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방향으로 가든지(즉, 불신의 모습으로 가든지, 결정론적 입장에로 가든지), 이런 생각은 생각이 너무 단선적이다. 이런 입장을 가지는 분들은 타락도 결국은 인간을 구원하는 선한 결과를 낳았으니 그것이 적극적 의미를 지닌 것이라고 하면서 타락이 결과적으로 좋은 것이었다는 함의를 전하려고 한다. 소위 ‘하이퍼 칼빈주의자’(Hyper-Calvinism)들이 여기에 속한다(‘코넬리우스 반틸’, 2007, 98-103쪽).섭리에 대해서 생각할 때 잘못 생각하는 또 다른 예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우리들이 다 설명할 수 있다는 태도를 가지면서 말하는 것이다. 나름대로 소위 “모든 것에 대한 이론”을 만들 수 있고 그것을 가지고 이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입장은 결국 이상한 결론을 내는 경우가 많다. 이런 입장의 궁극적 문제는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헤아릴 수 있고, 심지어 다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하다가 사람들의 저항을 얻게 되는데, 이를 피한다고 하면서 결국 하나님도 전지적 관점을 가질 수 없는 분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자신들이 겸손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이 영원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실 수 있음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을 제한하며,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이 계시한대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면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어떤 것은 알지 않기로 하셨고, 결정하신 것이 없다는 입장을 말하는 소위 ‘열려진 유신론’, ‘개방된 유신론’(Open Theism)도 이런 문제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우리 이웃의 신학들’, 2014, 141-151쪽).섭리를 대하는 바른 태도이런 잘못된 생각의 태도에 반(反)해서, 성경적으로 바르게 생각하시는 분들은 누구든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그의 기쁘신 뜻대로 계획하시고 경영하시는 하나님께서 결코 “죄를 만드신 분이 아니며, 죄를 일으킨 분이라는 혐의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단언해 왔다. 이는 이 세상의 모든 일의 발생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음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후대의 용어로 표현한다면, 이 세상에서 악한 일이 일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이기는 하나, 하나님이 이런 악한 일을 만드신 분이거나 하나님께서 악한 일을 일으키신 분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에 대적하는 사탄과 그 수하에 있는 “악한 영들과 악한 사람들이 불의하고 공정하지 않게 일을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일을 잘 하시고 정의롭게 하실 정도로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은 크고 우리들로서는 헤아리기 어렵다”고 한 것이다. 결국 우리들로서는 모든 것을 정확히 파악하여 모든 것을 다 묘사할 수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악한 일들도 선으로 변용시켜서 결국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이루신다고 하나님을 무한히 믿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른 태도는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옳으시다”는 것을 참으로 믿고 그것을 모든 정황에 적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의 악한 일들과 도덕적인 악인 죄가 발생하는 그 모든 것을 다 옳다고 하거나 그 모든 일이 어떻게 설명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님을 잘 파악해야 한다. 그저 우리들은 구체적인 정황은 잘 모르지만, 이 모든 과정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모든 뜻을 다 온전히 이루시고야 만다는 것을 “믿고 말하는” 것이다(Paul Helm, 이승구 역, 하나님의 섭리, 2004).이런 태도는 결국 우리가 호기심을 가지고 모든 것을 다 탐구하여 모든 설명을 다 할 수 있다는 입장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대로 바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무모한 호기심을 가지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바를 탐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1)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가히 파악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고 우리의 생각의 한계, 정당한 이성의 작용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며, (2) 하나님께서 파악하라고 한 것까지만 우리가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3) 그것을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는 그저 하나님께 맡기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것이다. 이럴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각하는 기능인 이성이 제대로 기능하는 것의 한 측면이 드러난다.이것은 이성의 한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칸트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각한 “이성 비판”, 즉 “이성의 한계를 분명히 함” 이상의 함의를 지니는 것이다. 이런 칸트주의자들은 이성의 한계 내에서는 마치 이성이 주권자이며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처럼 하여서 그 한계 내에서는 겸손하지 않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칸트는 종교도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결과 구속 종교를 피하려고 하면서 그저 도덕 종교로 기독교를 변용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제대로 하면 오히려 이성이 “신앙의 한계 내에서” 작용해야 한다. 이성이 제대로 작용할 때 드러나는 또 다른 측면은 이성이 하나님의 계시를 잘 정리하는 도구 역할을 제대로 하는 이성의 “도구적 사용”이라고 할 수 있다(Cornelius Van Til, ‘개혁주의 조직신학 서론’ 1995).이 두 측면이 “신앙하는 이성”, 소위 “중생한 이성”의 모습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입장이야말로 섭리에 대해 바르게 생각하며 살도록 하는 것이다.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가운데서 계시하신 것만을 배우고, 그 한계를 넘어 가지 않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 감취어진 것들이 있음을 인정하고, 겸손과 존숭의 태도로 하나님의 공정한 판단을 높이고 찬송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다.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에는 이렇게 하나님만을 높이고 겸손히 그의 의로우심을 인정하면서 우리의 한계와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내로 기다리는 것이 포함된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생각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매일 매일 그리스도로부터 배우며 겸손히 그의 뜻을 따라 사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족하는 것이다. 섭리를 생각하며, 섭리를 참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 살아간다.여기서 나름대로 섭리를 강조하며 자연의 이법(理法)에 순응하면서 살 것을 권하던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나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 같은 로마 시대의 스토아 철학자들과 성경적 섭리를 말하며 믿는 진정한 섭리론자들을 근본적 차이가 드러난다. 물론 근본적으로 섭리를 하시는 분이 우리가 믿는 것과 같이 인격을 가진 분이냐 아니면 무인격적인 자연의 이법이냐 하는 차이도 있다. 그러나 그 자명한 것 이상으로 “섭리를 참으로 믿는” 자들은 참으로 겸손하게 생각하고, 사는 일에서 기꺼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고 하며,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으로 만족한다.우리 상황에 적용하며다시 한 번 자문해 보자. 우리에게 코로나19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조금이라도 불평이 있다면 우리들은 바르게 생각하며 느끼고 사는 것, 즉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오히려 이 세상을 따라 가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이 모든 사태를 스스로 다 설명할 수 있다고 오만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겸손하게 그리스도로부터 배우려는 사람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지금과 같은 복잡한 상황의 한 가운데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하나님에게서만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며, 우리에게 해결의 열쇠가 없음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 사태는 타락한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는 그야 말로 “출구가 없음”(no exit!)을 잘 드러내어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가 된다. 타락한 우리의 삶 자체는 그야말로 닫혀진 세계(closed world)일 뿐이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이 세상이 문제를 해결하고 열려질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이런 죄와 악들의 생성자가 아니시며 이런 죄와 악들을 조성하신 분이 아니시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 통제 하에 있음은 분명하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악들을 선으로 변하게 하시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 하나님을 믿으면서 생각도 겸손하게 하고, 살 때도 참으로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존해 사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그것만이 우리의 살 길이다. 여기 먼저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이 모든 정황 가운데서 그렇게 할 수 있기 원한다. 그리고 아직도 믿지 않는 분들이 우리 모두 살 수 있는 이 유일한 길을 받아들여서 우리와 같이 이렇게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그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청유한다. 진정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만이 코로나19 상황에서도 가장 바르게 나아가는 우리의 유일한 길이다. 다른 길은 없다(No other way!). 구원 문제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문제에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참으로 그를 그의 의도대로 따라가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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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 그리스도인의 “더 나은 의”
by 이춘성
2020-10-23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마태복음 5-7장의 예수님의 가르침은 ‘산상설교’로 불린다. 산상이란 명칭이 붙은 것은 이 설교가 산 위에서 행해졌기 때문이다. 5장 1절에는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만 보면 예수님만 산에 계시고 무리와 제자들은 산에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로핑크(Gerhard Lohfink)와 같은 신약학자들은 예수님이 산으로 올라가셨고, 무리 중에 제자들만이 예수님을 따라 산에 올라갔다고 설명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누가 예수님을 따라 산행을 하였는지, 특별히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 고된 산행을 할 만큼 적극성이 있는 자들이며, 이들은 소수라는 것을 의도하고 있다고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 문장은 구약의 어떤 사건을 가리키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시내 산에서 갈릴리 이름 없는 산으로산상설교의 도입부는 시내 광야에 있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와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가나안에 세울 하나님의 나라의 삶의 원리와 법을 가르치시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 모습은 출애굽기 19장 20절 이하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 곧 그 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 모세를 그리로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가매”(출 19:20) 하나님은 시내 산에 계시고 모세를 불러 말씀하셨다. 그리고 모세와 장로들은 광야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산상설교에서도 예수님이 산에 계시고 제자들이 나아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 이런 구도는 구약의 시내 산 설교와 신약의 산상설교가 서로 비교되도록 한다.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백성을 가르치시며 주신 것이 무엇인가? 십계명 두 돌판에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이다. 이것은 앞으로 세워질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이 지킬 삶의 원리, 윤리이며 법이다. 그렇다면 산상설교는 무엇일까? 예수님이 이루실 대속의 구원 사건 이후에 죄에서 탈출한 사람들로 만들어질 하나님 나라의 삶의 윤리와 법이 산상설교이다. 그러기에 산상설교는 오래전에 있었던 좋은 말씀, 혹은 따르기에는 너무 높고 숭고한 이상적인 말씀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구원받은 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며, 지켜야 하는 삶의 윤리이며, 법이 산상설교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은 이제 산상설교의 내용으로 우리의 삶을 판단 받고 우리가 얼마나 부패한 존재인지, 의롭지 않은지 알게 된다. 더 높은 기준과 본질적인 기준으로 우리의 삶이 판단 받는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알아볼 ‘더 나은 의’다.산상설교의 주제산상설교의 핵심 주제는 ‘더 나은 의’다. 이 내용을 담고 있는 17-20절에는 비교급으로 표현된 ‘더 나은 의’의 비교 대상이 무엇인지 나온다. 그리고 그 관계성을 규정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17) 예수님은 시내 산의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이를 완전하게 하러 오셨다고 한다. 완전이란 가득 채워서 부족한 부분은 메꾸고 채워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과거 시내 산의 윤리와 법에 부족함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의 시대와 상황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충분히 요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앞으로 이룰 하나님 나라와 그곳에 들어갈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더 고차원의 완전한 법과 원리를 요구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를 어려운 말로 표현하면 계시의 점진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이 창세부터 발전하여 완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계시의 점진성, 하나님 나라 윤리의 완전을 향한 발전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 오늘 본문은 이것이 무엇이며, 신자들이 어떻게 이를 극복할 수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율법 혹은 선지자우선 17절의 내용을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율법이나 선지자(τὸν νόμον ἢ τοὺς προφήτας·)”는 무엇을 의미할까? 앞과 뒤가 동일한 운율과 단어로 끝나는 시적인 용법인 대구법과 같이 ‘율법과 선지자’는 산상설교의 마지막 결론 부분인 7장 12절에도 나온다. 예수님은 설교의 마무리에서 “율법과 선지자(ὁ νόμος καὶ οἱ προφῆται)”라고 말씀하셨다. 차이점은 17절은 ‘율법 혹은 선지자’로서 이 둘 중의 하나를 의미하지만, 7장 12절은 ‘율법 그리고 선지자’로 둘 다를 뜻한다는 것이다. 당시에 7장 12절의 ‘율법과 선지자’는 일반적으로 통용하는 관용어로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였다. 그 이유는 구약성경은 토라로 불리던 율법이 기록된 모세 오경과 그 외의 선지자들에 의해서 구전, 기록된 선지서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토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처음으로 주신 하나님의 법, 말씀으로 시내 산에서 하나님에게 받은 십계명과 그 외에 모세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한 5개의 성경책을 가리킨다.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법을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하자(삿 21:25), 이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토라로 이끌기 위해 선지자들을 대언자로 보내셨다. 이들 선지자에 대한 기록은 역사와 시, 지혜, 예언 등의 다양한 문학적 장르로 기록되었고, 히브리어 성경은 이것들을 선지서라고 불렸다. 그러한 이유로 구약 성경은 토라로 불리는 모세 오경과 선지서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율법과 선지자”라고 불렀던 것이다.하지만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토라와 선지서에 대해서 이해하는 방식과 그 위상의 문제 때문에 크게 두 파로 갈라져 있었다. 이것은 성경 해석을 둘러싼 신학적 이유에 근거하였다. 먼저 성전의 제사장과 서기관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사두개인들은 모세 오경, 즉 토라만 직접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였다. 이들은 하나님이 직접 모세에게 말씀하여 주신 토라만 성경으로 인정하였다. 이와 달리 지방을 중심으로 개혁 운동을 일으키며 신앙과 삶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던 신진 세력이었던 바리새인들은 토라 외에 선지서의 말씀들도 성경으로 인정하였다. 토라를 재해석하고 토라로 돌아오라고 가르친 선지자들의 가르침은 단지 토라를 쉽게 풀어쓴 것이 아니라 발전된 토라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토라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선지자들을 통해 더 발전되고 향상되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진보적인 주장이었다. 바리새파는 토라도 중요하지만, 더 향상, 발전된 내용을 담은 선지서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더 나아가 바리새파의 랍비들은 주석과 책들에 근거해서 십계명과 그 부속 조항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바리새파는 토라 외에 더욱 더 많은 항목의 법을 만들어 이것을 따르는 것을 경건의 바른 모습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두 세력의 어느 편의 손도 들어주시지 않았다.율법예수님은 율법(토라) 혹은 선지자 중 하나를 폐하고 이 중의 하나만을 선택하여 긍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오히려 예수님은 이 둘을 모두 긍정하였고, 더 나아가 이 둘을 완성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주장하셨다. 예수님은 먼저 18절에서 율법(토라)이 무엇인지 가르치신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이 말씀은 토라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원래 의도대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루리라”는 헬라어의 중간태의 동사이다. 중간태란 능동태도 아니고 수동태도 아닌 상태를 의미한다. 능동태는 주어의 의지와 주도성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수동태는 주어의 뜻이 아닌 타인의 뜻에 따라 주어가 움직인다. 하지만 중간태란 주어가 주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수동적이지도 않은 상태, 바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안에서 인간이 능동적으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고 성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유한한 인간의 모습에 대한 묘사이다. 유진 피터슨은 중간태의 신앙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는 특유의 환경 속에는 극단적인 대비가 불가능한 순간이 너무나 많다. 두 가지 의지가 작용하지만, 두 가지 모두 상대편을 배척하지 않고, 상대편을 소멸시키지 않으며, 서로 존중하는 경우가 있다. 헬라어 문법책은 이렇게 말한다. “중간태는 어떤 행동의 결과에 참여하는 주어들을 묘사하는 동사의 용법이다.” … 나는 다른 존재 - 창조와 구원을 이루신 주님 - 에 의해 시작된 행위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행위의 결과 속에 참여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내가 그 행위를 한 것이 아니며, 그것이 나로 하여금 어떤 행위를 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나는 이미 의도된 행위 속에 참여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을 우리 삶 속에서 촉진시키기 위해 줄을 잡아당기지 않는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독단적인 정체성에 굴복하도록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조작(능동태)하거나 하나님에 의해 조작(수동태) 당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행위 속에 포함되고 거기에 참여하지만 그것을 조종하거나 제한하지 않는다(중간태).” (유진 피터슨, ‘묵상하는 목회자’, 좋은씨앗, 157-159쪽)선지자이어서 예수님은 선지자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여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19) 여기의 ‘가르치는 자’는 선지자에 대한 것으로 생각한다. 선지자들은 계명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것 하나도 버리지 않고 가르치며, 이를 따라 살아서 모범을 보였던 자들이었다. 선지자들은 토라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토라를 해석하고 당시의 사람들에게 토라로 다시 돌아오라고 가르친 사람들이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잃어버린 율법을 가르치고, 원래 의미를 밝혀 주는 빛과 소금과 같은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이스라엘을 각성시켰고, 이들이 다시 율법으로 돌아오길 그들의 삶으로 보여준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과거의 법이 과거의 관습이나 문화가 아닌 영원한 하나님의 법, 불변하는 삶의 원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예수님은 이런 이들의 삶에 대해서 긍정하시면서 이들을 천국에서 큰 자로 칭찬하셨다.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은 이러한 이들의 좋은 삶이 일종의 새로운 법과 규정이 되는 것을 경계하셨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율법과 선지자예수님은 제자들이 취해야 할 바른 입장에 대해서 가르치셨다. 20절의 말씀은 토라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던 사두개인이 다수였던 제사장과 서기관, 상대적으로 선지자를 중요시여긴 바리새파 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부추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양쪽을 다 취하라는 기회주의적 가르침도 아니다. 예수님은 이 둘을 모두 인정하시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이 둘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가르치신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일차적으로 더 낫다는 것의 결론은 산상설교의 결론 부분에 해당하는 황금률이라 불리는 7장 12절에 나온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또한 산상설교 전체는 이 원리를 가르치고 있다. 그러기에 산상설교의 결론에 이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더 낫지 못하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또한 ‘더 나은 하나님 나라의 윤리’, ‘정의’가 무엇인지 분명해질 것이다. 앞으로 “산상설교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윤리” 시리즈는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논리를 따라서 ‘더 나은 의’가 무엇인지 알아볼 것이다.그리스도인의 길마지막으로 예수님이 과거를 대표하는 보수와 현재와 미래를 대변하는 진보라는 두 프레임 속에서 ‘더 나은 의’가 하나님 나라 윤리를 어떠한 방식으로 제시하고자 하는지 간략히 알아보고자 한다. 예수님은 제사장과 서기관이 다수인 사두개파로 대표되는 사회의 보수주의자들과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개혁적인 진보주의자들의 어느 편에도 서지 않으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이들 중 하나의 편에 서는 것을 허용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들 중 한 편에 서는 것이나 이 둘을 적절히 조화하고자 하는 중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을 뛰어넘는 더 나은 길에 서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과거를 보수하고 지키려는 사두개인들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은 과거에만 집착하고 현재와 미래를 무시하는 비전 없는 보수주의자를 보셨다. 과거를 재해석하고 새롭게 나가려는 진보파인 바리새인들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은 과거를 재해석한다고 하면서 전통을 무시하고 새로운 법을 만들어 새로운 기득권으로 자리하려는 진보주의자들의 위선을 보셨다. 이를 보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이런 자들에게 농락당할 수 없는 거룩한 말씀이라고 가르치셨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인 이 두 세력의 해석과 가르침보다 낫지 않으면 결국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들 중의 하나와 같이 될 것이라는 사실도 분명히 알고 계셨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강하게 경고하신 것이다(마 5:20).이것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도 강한 경고의 말씀이다. 보수 기독교, 진보 기독교와 같은 정치 진영화 된 기독교와 교회가 ‘더 나은 의’를 추구할 수 있는 교회라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어느 한 편에 서기를 강요받는다. 예수님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두고도 율법 혹은 선지자로 나누고 이를 현실 정치의 진영으로 나눠 싸운 것처럼, 지금도 보수 혹은 진보라는 선택지 속에 기독교인들을 프레임화 하려는 세력과 유혹이 있다. 결국, 이 때문에 교회 안에서 편 가르기를 하고 서로를 향해 미움을 만든다. 하지만 예수님의 길은 이 선택지를 모두 취하겠다는 어정쩡한 중립이 아닌 이것들을 모두 뛰어넘는 ‘더 나은 제3의 길’을 찾으라고 요구한다. 신자가 이 세상에서 가야 할 길이 바로 이 길이다. 분명한 것은 이 제3의 길은 보수와 진보를 모두 담을 수 있으며, 이 둘을 모두 조화롭게 하는 길일 뿐 아니라 이를 뛰어넘는 더 나은 길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천 년 전이나 지금도 산상설교를 통해 세상 속에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주시고자 하신 예수의 길, 하나님 나라의 윤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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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산
십계명
율법
선지자
더나은의
바리새인
사두개인
이웃들이 고백하는 새로운 신조
by Brett McCracken
2020-10-20
2017년, 반 트럼프 저항의 일환으로 파생된 세속적 의미의 “종교적” 부흥이 시작되던 그해에, 나는 그런 사회적 변화를 처음 알아차렸다. 실버레이크(L.A.), 포틀랜드, 샌프란시스코 및 기타 진보적 정치 세력이 주도하는 지역의 커피숍과 빈티지 미용실 창문에서 ‘그것’을 보았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여기서는 여러분을 환영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다양한 소외 집단의 목록이 열거되어 있는 문구 또는 표지판(sign) 이야기이다. 이 표지판은 점진적인 동맹과 포용성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표지판을 내건 곳은 “안전지대”라는 말을 하고 싶겠지만, 사실 나처럼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성 윤리를 믿는 기독교인도 거기서 환영받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최근에 나는 일반 주택 마당에 이 표지판의 2.0 버전이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기독교인이 고백하는 신조(신앙고백)와 비슷한 언어로 시작하기 때문에 진보주의가 표방하는 “세속적 종교”라는 모티프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 집에 사는 우리는 믿기를 …” 외에도 다양한 버전이 있지만 가장 자주 본 것(남가주 지역에서만 최소한 12군데에서 보았다)은 다음과 같다.이 집에 사는 우리는 믿기를:흑인 생명은 소중하다여자의 권리는 인간의 권리이다불법적인 인간은 없다과학만이 진짜이다사랑은 사랑이다친절은 모든 것이다이런 표지판을 마당에 자랑스럽게 세워 두는 사람들의 정치관을 공유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이 메시지가 가진 중요성까지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런 주장은 기독교인들에게 깨달음과 더불어 확신을 주어야 한다. 다름 아니라 진보적인 이웃과 해야 할 것은 논쟁이 아니라 공유점을 찾는 상호간의 연결이라는 점이다. 탈 기독교 신조표지판의 언어가 주는 깨달음은 이것이다. 한 줄 한 줄의 의미 속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을 정치적 부담을 내포한 정치적인 함의가 포함되어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 저변에 깔려 있는 메시지는 다름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내포하고 있거나 그게 아니면 안타깝게도 그 진리를 왜곡하고 있다. 이제 이 신조를 한 줄 한 줄 살펴보자.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문제 많은 BLM 조직은 잠시 잊자. 어느 특정 그룹의 생명만 중요시하는 게 내포한 부작용도 잠시 옆으로 밀어 놓자. 이 구호가 가진 핵심 메시지는 다름 아니라 인간 생명이 가진 고유한 존엄성의 확인에 있다. 이 경우에는 그게 흑인에게만 해당되지만, 이런 메시지는 사실상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성경적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창 1:27). 기독교인이라면 흑인 생명이 소중하다는 주장에 동의해야 할 뿐 아니라, 이 세상 그 어떤 다른 종교도 생명의 소중함에 관해서 기독교만큼 강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피력해야 한다. 여자의 권리는 인간의 권리이다안타깝게도 이 문구를 올려놓은 사람들은 ‘여성의 권리’ 속에 무제한적인 낙태의 권리가 포함된다고 주장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인권’에 대한 도덕적 권위가 바로 그 순간 훼손된다는 점이다. 태어나지 않은 인권도 결국은 인권이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여성의 존엄성과 평등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은 실제로 그리스-로마 세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여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존엄하게 했던 성경(창 1:27, 갈 3:28)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가 여성들에게 그토록 매력적이었던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하다. 게다가 레베카 맥래플린(Rebecca McLaughlin)이 지적했듯이, 보편적 인권에 대한 개념 자체는 기독교에서 비롯되었다.불법적인 인간은 없다진보적 정치 신념의 맥락에서 볼 때 이것은 미국 이민 정책에 대한 진술이다. 그러나 국경과 정책의 특수성이라는 맥락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보면, 이 주장 또한 신학적 진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에베소서 2장 19절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또는 골로새서 1장 21-22절 “전에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를 보라. 모든 인간은 죄 때문에 “불법” 상태에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합법적이라고 인정을 받았다. 과학만이 진짜이다표면적으로만 볼 때 아마도 기독교인이라면 가장 동의할 수 없는 진술이 이것일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장이 말하는 메시지는 특히 기후 변화와 과학 거부(science denialism)와 관련한 특정한 정치적 분열이다. 물론 많은 경우에 과학이 기독교 신앙에 대적함에도 불구하고, 과학이 말하는 현실과 모순되거나 과학의 가치를 저해하는 그 어떤 메시지도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아이작 뉴턴(Isaac Newton)과 같은 과거의 과학자 또는 프란시스 콜린스(Francis Collins)와 같은 오늘날의 위대한 과학자들은 신앙과 과학을 조화시키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은 사랑이다이 짧은 문장으로 된 슬로건은 동성애, 이성애, 양성애 등 어떤 형태가 되었든지 모든 ‘사랑’을 다 긍정하려는 LGBTQ 운동의 주장이다. 이것이야말로 이 표지판에 적힌 내용 중에 가장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부분적으로는 의미론적으로 무의미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실로 성스럽고 소중한 것을 단지 “당신이 원하는 수준까지” 한없이 자유롭도록, 그 가치를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세상 모두가 다 사랑이라면, 그건 결국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과 같다. 그리스도인 또한 사랑이 사랑이라고 단언하지만, 반역적인 피조물이 아닌 성경의 하나님은 “이런 식의 자기 참조 문장(역자 주: ‘이 문장은 거짓이다’라는 것처럼 문장 자체가 역설을 담고 있다는 의미. self-referential sentence)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에게 알려준다.”친절은 모든 것이다이 말이 의미하는 진보적 확신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친절이다. 기본적으로 서로에게 친절하고(엡 4:32), 황금률에 순종해야 한다(마 7:12). 이것은 중요하고 또 성경적이지만, 이 슬로건이 틀린 부분은 인간의 친절이 마치 타락한 인간의 죄성까지 극복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인간의 능력을 과도하게 신봉하는 점이다. 기독교적으로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하나님의 친절이 모든 것이다.” 즉, 하나님이라는 중요한 단어를 추가해야 한다. 하나님의 친절은 인간의 친절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회개로 이끄는 친절(롬 2:4)이고 또 구원을 가져다주는 친절(딛 3:4-6)이다. 연결점(bridges)을 인식하자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는 진보 진영의 신조가 결코 성경적 진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평등, 존엄성, 사랑, 친절에 대한 진리를 생각할 때, 처음 형성한 기독교 문화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고, 또 기독교의 가치를 철저하게 담고 있는 ‘탈 기독교’ 신조라고 할 수 있겠다. 기독교인에게는 “이 집에 사는 우리는 …”이라고 써서 마당에 세워놓은 표지판이 결코 정치적 도발의 상징이 아니라 신학적이고 복음적인 초대가 되어야 한다. 종종 모든 문제를 다 휩쓸어버리는 정치적 욕지거리와 두려움만 뛰어넘을 수 있다면, 이 표시야 말로 얼마나 생산적인 대화의 시작점이 될 수 있겠는가? 그렇다. 이 표지판에 담긴 성경적 사상 중 일부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심지어 파괴적인) 정치적 방식으로 왜곡되고 재구성되었다. 그러나 그런 식의 왜곡은 보수적 우파의 메시지 속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성경적 진리가 당파적 목적 때문에 왜곡되거나 잘못 사용되는 것을 제대로 분별하고 또 필요한 도전을 던져야 한다. 그럼으로 우리는 얼마든지 공통으로 인정할 수 있는 은혜의 발판을 만들어낼 수 있다. “우리는 믿는다”라고 표현한 신조의 문장 구조는 모든 인간이 종교적이며 자신을 넘어서는 무엇인가를 믿어야만 하는, 예배하도록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특별한 마당 표지판에 숨은 진짜 메시지가 무엇이란 말인가? 달리 말해, 이 표지판을 내건 사람들이 믿고자 갈구하는, ‘자신을 넘어서는 무엇’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바로 여기가 기독교인이 발을 들여놓아야 하는 지점이다. 은혜와 사랑을 바탕으로 인간의 마음을 궁극적으로 만족시킬 사랑과 정의 그리고 진리의 원천과 표준 속으로 그들을 이끌어야 한다. 종교적 감상주의로 가득한 이 표지판은 사실 기독교인을 향해 사랑과 호기심이 넘치는 대화를 하고 싶다는 간청이기도 하다. 대화를 시작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흑인의 생명 또는 인간의 생명이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도덕적 근거는 무엇이지요?” “사랑은 사랑이라는 말에서 ‘사랑’은 어떻게 정의해야 하나요?” “누군가 남들 앞에서는 친절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주 타락한 사람이라고 할 때, ‘친절이 모든 것이다’라는 이 말은 어떻게 되는 것이죠?”탈 기독교 시대를 맞아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에는 과거와 다른 종류의 많은 새로운 도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조가 적힌 마당 표지판은 우리에게 여전히 새로운 기회가 많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Your Neighbor’s New Creed: ‘In This House, We Believe . .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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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낙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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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M
우리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
by Eric B. Watkins
2020-10-19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히 11:28).출애굽기 12장 13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소개된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 이 말씀은 성경 전체에서, 아니면 최소하나마 구약성경 전체에서 가장 큰 위안을 주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위안이란 위기의 한복판에서 찾아올 때가 많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을 때도 그들은 결코 안락한 상태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수백 년 동안 애굽인 아래서 거친 종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셨지만, 수세기 동안 철저히 침묵하고 계셨다. 그리고 애굽은 이방 신들로 가득한 땅이었으며, 그 신들 가운데 하나로 자처했던 바로는 앞서 활약한 요셉이나 그 요셉이 섬기던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이렇듯 세월이 흘러 과거의 따뜻한 기억은 서늘하게 식어 갔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뿐 아니라 애굽인 전체를 위해 행하신 모든 역사조차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이제 하나님 백성은 불타는 태양처럼 내리쬐는 바로의 허영 아래서 말라가며, 끊임없이 일하고 또 일하는 종살이로 수척해져만 갔다. 그렇게 위기의 시간이 무르익었다.바로 이러한 어두움을 가르는 서광은, 다름 아닌 구속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하셔서 이전에 맺은 언약을 상기시키며 그 약속을 이행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더불어 찾아오게 된다. 그래서 한 장면 한 장면이 지나며, 바로가 신봉하던 신들이 그분 앞에서 하나씩 무너진다. 마치 맹렬히 도전하는 성읍을 공격하기 전 그 성읍의 외곽 지역부터 짓밟아 들어가는 군주와 같이, 하나님은 바로의 신들을 하나씩 정복해 나가신다. 그러나 바로는 지나치게 교만해진 자기 자아를 요새로 삼아 그 안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완고한 마음을 키워 나간다. 이에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이 더 완고해지도록 내버려 두신다. 이러한 긴장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그분 앞에서 바로의 권력이 공중의 연기처럼 무력히 사라지는 장면을 통해 더욱 극대화된다. 바로가 신뢰하던 애굽의 모든 신들은 그분의 심판이 바로 자신을 향해 엄습해 올 때까지 차례대로 고꾸라진다. 그러다가 결국 마지막 재앙이 이르게 되자, 바로의 주변부를 치는 공격이 아니라 바로의 우상 숭배가 일어나는 그 현장, 다시 말해 그 마음을 치는 습격이 이루어진다. 곧 바로의 장자를 앗아가는 재앙이 들이닥친 것이다.우리는 이 대목을 급히 읽고 넘어가면 안 된다. 애굽인의 신앙에서 바로는 대대로 신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애굽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었는데, 바로가 그들 중 하나로 간주되었고, 그 신들의 주요 임무 중 하나도 다름 아닌 바로와 그 가족을 지키는 일이라고 여겨졌다. 이런 점에서 바로의 장자는 단지 왕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아닌 미래의 왕, 즉 애굽의 왕좌에 올라 온 땅을 다스리는 신의 권세를 누릴 자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바로의 장자와 애굽인의 모든 장자를 치신 일은 바로의 그 마음뿐 아니라 전체 애굽인의 세계관에 결정타를 날리신 사건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애굽 전역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는 어린 양의 피가 뿌려지지 않은 애굽의 모든 장자를 덮쳤다. 심판자가 그들을 심판하신 것이다. 이로써 바로는 처참하게 패배해 무너졌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언약에 담긴 구속의 소망은 죄와 고통과 사망으로 얼룩진 흑암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곧 심판이 다가오는 중에도 하나님은 그 백성을 절망 가운데 두지 않으셨던 것이다. 마지막 재앙이 들이닥치기 전날 밤, 이스라엘 백성은 흠 없는 어린 양을 잡아 죽이고 그 피를 집 문설주와 인방에 뿌렸다. 이는 예고된 그날 밤 심판자가 애굽 전역을 지나가다가 어린 양의 피를 보면 ‘넘어가게’ 되리라는 약속에 근거한 의식이었다. 그 약속은 하나님의 구속을 보여 줌과 동시에 그분의 무시무시한 심판을 보여 주기도 했다. 즉 어린 양의 죽음에서 예시되는 그 끔찍한 심판을 상기시키면서도, 또한 하나님이 자기 백성 대신하여 심판을 당하도록 다른 대속물을 제공하신다는 사실 역시 그 어린 양의 피를 통해 확신시켰다. 바로 여기에 이중적인 전가가 암시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우선 어린 양은 흠 없고 순결했으며, 눈에 띄는 결점도 없었다. 그런 양은 때가 묻지 않은 만큼 값도 비쌌다. 이처럼 흠 없는 어린 양이 각 집안의 장자를 대신하여 죽게 되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은 본성상 죄악되었지만, 어린 양이 그들 자리를 대신해서 자기 피를 대속 제물로 흘림으로써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를 가로막던 죄악이 속하여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심판자가 그 피를 볼 때, 그들을 심판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신 위안의 약속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위기가 역전된 것이다.오늘날 하나님 백성인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큰 위안의 약속이 있다. 우리의 위안은 단순한 어린 양과 같이 한 마리의 짐승이 보여 주는 구속의 약속을 통해서가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흘리신 구속의 보혈을 통해 찾아오는 참된 위안이다(요 1:29). 이 어린 양은 혈과 육을 입은 세상의 대적들이 아닌 우리가 지은 죄의 삯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이에게 임할 캄캄한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드려진 제물이었다. 이 모든 점에서 오랜 세월 애굽에서 종살이한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 영혼의 노예 상태를 생생히 보여 준다. 이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남자나 여자, 혹은 노예나 자유인이나 상관없이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사실이다. 우리 모두는 본성상 죄에 종노릇하여 그 죄의 삯인 사망을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지닌 가장 큰 위기가 있다. 더욱 끔찍한 사실은, 출애굽기에서 애굽 전역을 지나갔던 그 심판자가 마지막 날 종말론적 심판을 행하실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 최후 심판은 그분의 은혜 아래 몸을 숨기지 않은 모든 이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복음은 바로 그 구원을 하나님이 행하신다고 증언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가리셔서 최후 심판을 행하실 때 그 피를 보며 우리를 넘어가신다고 증언한다. 나아가 이보다 더 좋은 소식도 들려주는데,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깨끗하고 순결하고 거룩할 뿐 아니라 사랑 받는 자녀로 받아주신다고 증언한다. 왜냐하면 흠 없는 어린 양의 피가 우리를 가려 주기 때문이다.이처럼 복음은, 유월절 사건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 주던 진리를 오늘날 우리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그 진리는, 우리의 어떤 능력이나 성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드러난 그분의 은혜와 자비 때문에 이처럼 죄악된 우리에게 소망과 위안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렇듯 복음은, 율법이 요구하던 모든 사항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충족되었다고 말한다. 이 복음의 위안을 어떻게 받겠는가? 오직 믿음을 통해서 받는다. 곧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을 가지고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 양의 피를 뿌려야 했듯이, 오늘날 하나님 백성인 우리 역시도 믿음으로 그분의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뿌려졌기에 마지막 심판 때 심판자가 우리를 넘어가게 되리라는 그 약속을 말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종살이하던 시절의 두려움을 벗고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그 거룩한 임재 가운데 우리를 기쁘게 받아주실 하나님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큰 위안이란 우리에게 있을 수 없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Christ Our Passover번역: 장성우
심판
재앙
유월절
하나님의언약
애굽
종말
복음
구원
예수그리스도
신자에게 있어 ‘은혜’와 ‘기도’에 관하여
by 장대선
2020-10-17
우리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흔히 사용되는 단어는 단연코 ‘은혜’(Gratia)일 것이다. 물론 은혜 외에도 ‘감사’나 ‘기쁨’같은 단어들도 흔히 사용되지만, 신앙의 대화 가운데 가장 광범위하게 쓰이는 단어가 바로 은혜이며 거의 일상의 감탄사라 할 만큼 자주 사용되는 단어이다.하지만 동시에 은혜에 대한 이해와 그 용법에 있어, 보편적으로나 광의적(broad sense)으로 사용되는 실정이어서 종종 그 의미와 실천에 혼란을 야기하기도 한다. 예컨대 우산을 판매하는 신자에게는 비가 자주 내리는 일을 은혜라고 하겠지만, 또 소금을 판매하는 신자에게는 되도록 비가 내리지 않은 것이 은혜가 되는 모순의 상황에 종종 직면하는 경우가 있게 마련이다. 한마디로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은혜라는 단어는 다분히 주관적인 개념이며, 자신에게 감사와 기쁨을 야기하는 일련의 현상들이 바로 은혜로 인식되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가 있다.그런데 사실 신학적 의미에서의 은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고 통용하는 주관적인 개념과 다르게 아주 보편적이고 공적인 개념의 단어다. 대표적으로 우리의 신학과 신앙에 있어 기초적인 바탕을 이루는 인물인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은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와 수고(노력)를 반영하는 신학인 펠라기우스 주의(Pelagianism)를 반박하는 하나님의 주권의 문제 가운데서 다루어지는 전적인 은혜(summa gratia)가 바로 은혜라고 설명한다. 즉, 어거스틴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그에 따른 반응으로서의 선행(beneficium)에 반대하여,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이뤄지는 역사와 은총만을 그 은혜로 설명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칼뱅(Jean Calvin, 1509-1564)을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개혁적 신학자들이 말하는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그로 말미암아 우리들에게 전가되는 일련의 내용들을, 특히 구원과 관련한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은총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이미 로마 가톨릭의 신학과 교리 가운데서 편만하게 용인된 인간의 자유의지와 그것의 발현으로서의 선행, 그리고 공로(meritum) 등의 사상을 개혁하여,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서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 바로 종교개혁의 맥락 가운데 있는 ‘은총론’(gratia doctrina)의 요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그러한 은혜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이나 수고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란, 전적으로 하나님 안에서만 기인하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반면에 펠라기우스 주의의 자유의지론과 선행의 이해를 충분히 수용한 로마 가톨릭 신앙에 있어서 은혜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되, 우리의 의지와 노력(수고)이 충분히 반영되어 제시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에게 전적인 은혜를 베푸시되, 아무런 준비나 기대도 없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준비하며 소망하는 자들, 곧 스스로를 돕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에게 베푸신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바로 그러한 공로의 수단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도’다. 고행(ascetismus)을 비롯한 온갖 공로적 도구로서 이해되는 것이 로마 가톨릭의 기도에 대한 기초적인 개념인 것이다.사실 로마 가톨릭의 기도에 대한 이해는 종교개혁의 후손들이라고 믿고 사는 우리에게도 별로 생소하지 않은 실정이다. 개혁된 교회에 속한 신자들마저도 기도에 대해 공로적 이해가 편만해 있기 때문이다. 또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은혜’ 혹은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기도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이 형성되어 있기도 하다. 간단히 말하자면 간절하면서도 열심이 있는 기도를 통해 소망하는 바를 응답받는 것으로 은혜에 대한 진솔한 고백들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마태복음 7장 7-8절에서 주님은 간절하면서 열심이 있는 기도를 통해 소망하는 바를 응답받게 되는 은혜에 대하여 다소 지지하시는 듯한 말씀을 하신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구절들 가운데서 또 이르시기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다. 마치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바 소망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가장 최상의 것으로 응답해 주시는 분이 분명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7장 12절에서 조금 이상한 뉘앙스의 말씀이 이어진다. 갑자기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하시며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말씀하신다. 더구나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누가복음 10장 13절에서는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또한 전체적인 문맥과 다소 상충되는 것으로 보이는 말씀이다.하지만 누가복음 11장의 본문에서는 마태복음 7장과는 다르게 상당히 축약 기록하여 주님께서 전체적으로 어떤 취지의 말씀을 하시려는지를 더 넓게 파악해 볼 수 있다. 즉 기도의 모범인 ‘주기도문’(Lord's Prayer)에 관한 언급 가운데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 하신 것이 바로 이어지는 말씀의 문맥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구하여 기도할 것이 바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과 교훈으로 축약되는 율법의 취지를 따라 행하는 것이며, 아울러 이러한 율법의 취지를 깨닫고 따라 행할 수 있도록 성령을 주시리라는 것이 바로 누가복음 11장 13절의 언급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성경의 문맥과 취지를 따라서 우리의 개혁된 신앙에서는 기도가 자신의 소망하는 바를 얻어내기 위한 의지와 노력의 도구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은혜,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적용된 구원의 은혜에 대해 반응하며 감사해야 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사실 이 같은 성경의 취지는 이미 개혁된 교회들의 유산인 신앙고백과 교리문답들 가운데 잘 정리되고 반영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년)은 제18장에서 구원의 확신에 대한 교리 가운데서 ‘은혜’를 고백하고 있고, 또한 제21장의 경건한 예배와 안식일로서의 주일에 관한 교리 가운데서 ‘기도’에 관해 다루고 있다. 다만 그 맥락과 의미가 좀 더 포괄적인 범위 가운데서 다루어지고 있어 그 요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다. 예컨대 ‘은혜의 상태’에 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8장은 1항에서 고백하기를 “주 예수를 참으로 믿으며,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분 앞에서 전적으로 선한 양심에 따라 행하려 애쓰는 사람들은 지금 이 세상 가운데서 자신이 은혜의 상태에 있음을 확신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소망으로 확신할 수 있는데, 이러한 소망은 결코 그들을 부끄럽지 않게 한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또 제21장에서는 “경건한 예배에 속하는 하나의 특별한 요소”로서 ‘기도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하지만 기도에 관해 개혁된 신학의 설명이 항상 전체적인 맥락으로서만 다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기독교 교리를 강론하는 일련의 문답서들, 특히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논문 또는 신학의 전체와 실체’(a treatise of christian religion or, the whole body and substance of divinity)라는 책에 담긴 교리문답 가운데서 확연하게 구별하여 살펴볼 수가 있다. 카트라이트의 교리문답 제40장은 기도 혹은 기원(invocation)에 관하여 설명하며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라고 물은 뒤에 “기도와 맹세다.”라고 답하여, 기도의 성격이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에 대해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려야 할 것으로 설명한다. 계속해서 “첫째로 우리가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는가, 둘째로 누구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가, 셋째로 어떤 힘과 능력에 의해, 넷째로 어떤 이유로 기도해야 하는가?” 라는 일반적 질문들을 통해 기도의 속성을 설명한다. 그는 계속해서 기도는 ‘간구’와 ‘감사’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간구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구할 수 있는 것들을 우리가 구하는 것”이며, 이는 마태복음 6장과 7장, 그리고 누가복음 10장에서 주님께서 설명하시려는 의미와 맞닿아 있다고 설명한다. 또 카트라이트는 기도의 다른 부분인 ‘감사’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기도의 한 부분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한다”라며 “일반적으로는 세상의 통치에서, 특히 교회의 통치에서 보여 지는 그 분의 선하심, 지혜, 권능, 긍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한다. 또한 간구에 의해서 주신 그 특별한 은총들로 인해 찬양하며, 그밖에 우리가 그 분의 긍휼의 손길로부터 받았던 것들로 인해 찬양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전체적인 교리의 맥락에서뿐 아니라 기도라는 주제에 더욱 집중한 교리의 맥락에서도 확연하게 기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요구하고 끌어내는 수단(혹은 도구)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미 받은 구원의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께 반응하며 수반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기도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중요한 한 요소를 이루는 것이다.끝으로 기도에 관해 주님께서 말씀하신 순간들을 서로 긴밀하게 연결하여 보면, 우리가 마땅히 구할 것들에 대해서는 성령을 통해 비로소 확인할 수가 있다. 이는 곧, 누가복음 11장 13절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에서 파악할 수 있다. 또 성령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것처럼 합당하게 구할 것은, 이미 우리에게 주신바 율법과 선지자들의 강령들이니(마 7:12),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마 6:31절) 염려하며 간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33절)는 것이야말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9-10절)라고 하는 주기도문의 가르침에 충실한 기도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주님의 가르침 가운데 우리들이 구하는 것들 대부분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며 구하는 것들이라면, 우리들이 기대해야 할 것은 은혜라기보다는 믿음의 형태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과 관련해서 이미 주님께서는 가르쳐 이르시기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8절)고 말씀하신다. 바로 그러한 믿음으로 기도하는 신자들이라면, 아마도 주기도문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13절)이라고 한 문구의 의미를 깊이 실감할 것이다. 그런 신자들의 기도는 이미 받은 은혜 가운데 있는 믿음으로 기꺼이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감사의 기도, 곧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1장에서 고백한 것처럼 “경건한 예배에 속하는 하나의 특별한 요소”로서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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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시편 73편에서 아삽이 말하는 좋은 죽음
by Timothy Kleiser
2020-10-14
“줄거리를 포기하는 것이 나의 의도는 아니지만, 마지막에 내가 죽는 걸로 하지요.” 이건 마가렛 에드슨(Margaret Edson)에게 퓰리처상을 안긴 연극 ‘위트(Wit)’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비비안 베어링(Vivian Bearing)의 대사이다. 이런 암울한 장면은 한 가지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관객들로 하여금 비비안이 죽을 지 말 지에 대한 추측을 하게 하는 대신, 죽음 자체를 향한 비비안의(그리고 우리의) 태도에 집중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이다. 누구나 다 죽음을 맞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죽음에 관해 생각하는 시간은 실로 놀라울 정도로 빈약하다. 누구나 다 살기를 갈망하지만 동시에 죽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으며, 우리는 예외없이 이런 현실을 회피하는 데에 있어서 전문가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학자 제프 그린버그(Jeff Greenberg)가 이름 붙인 그대로, 죽음은 우리 삶의 “본질에 자리잡고 있는 벌레”이다. 소설가 필립 로스(Philip Roth)는 또 이렇게 말한다. “침착하고 합리적인 모든 사람 속에는 죽음을 생각하고 두려워하는 두 번째 사람이 숨어있다.”죽음이 무서운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게 끝(finality)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지금도 다가오고 있고, 죽음의 도래가 가져다주는 질문은 너무도 많다. 내 인생은 가치가 있었던가? 내가 그동안 살면서 이룬 것에 어떤 목적이 있었던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런 질문들을 직면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면 우리는 “나는 이제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됐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자극을 받는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좋은 죽음”을 갈망한다. 내가 “좋은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궁극적으로 증명하는 죽음 앞에서 누리는 평안한 준비 말이다. 페트라르카(Petrarch)는 이렇게 썼다. “좋은 죽음은 한 평생에 대한 영예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는 이를 보다 더 시적으로 표현했다. “잘 보낸 하루는 행복한 잠을 가져다주고, 제대로 산 인생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다준다.”좋은 삶= 좋은 죽음?기독교인에게 좋은 삶이 좋은 죽음이라는 공식은 역설을 가져다준다. 왜 거룩한 자가 고통받는데 악한 자가 잘 먹고 잘 살다가 평안하게 죽는가? 이 질문은 열두 편의 시편을 쓴 이스라엘의 음악가 아삽을 괴롭힌 문제였다(시 50, 73–83편).시편 73편에서 아삽은 인생의 문제와 슬픔에서 벗어나서 행복한 삶을 살다가 평안하게 죽음을 준비하면서 맞는, 사악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슬퍼하고 있다(4-5절). 이미 쓰고도 남을 엄청난 재산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람들은 부와 지위를 더 높이기 위해 폭력과 각종 억압을 사용하는 교만한 자들이다(6-7절). 이런 모든 과정 속에서 그들은 한없이 교만하여 하나님이 자신들이 하는 일을 알거나 관심을 갖고 있다는 식의 생각을 비웃으며 조롱한다. 죽음 뒤에 자신들의 삶을 판단하는 그 어떤 심판도 있을 리 없다는 생각에 그들은 아주 편안하게 죽음을 맞는다(8-12절).이런 사람들과는 정 반대로, 다윗 왕 밑에서 수석 음악가로 또 예루살렘에서 언약궤 앞에서 찬양 사역을 감당했던 아삽은 실로 의로운 사람이었다(대상 16:1-5). 그러나 이런 아삽의 모든 신실함에 대한 보상은 그를 죽을 때까지 괴롭혔던 만성적인 고통과 각종 고난이었다(14 절). 그는 점점 더 악인을 질투하게 되었고(3절), 한 걸음 더 나아가 궁금해졌다. 내가 고통받는 동안 악인이 내내 번영하는 이런 현실 속에서 내가 하나님을 따르는 게 무슨 소용이 있다는 걸까(2, 13절)?믿을 수 없는 인간의 재치비비안 베어링이 ‘위트’의 말미에서 죽을 것이라고 밝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청중은 그녀가 어떻게 죽을지를 알게 된다. 바로 난소암이다. 난소암의 예후를 들은 비비안은 자신이 죽음을 맞을 준비가 되었다고 확신하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누구야? 나는 영어로 된 그 어떤 작품보다도 더 깊이 있게 죽음을 탐구했던 ‘존 던의 신성한 소네트(Donne 's Holy Sonnets)’를 연구한 학자니까.” 매우 성공적인 학자인 비비안에게 죽음은 본능적인 현실이 아니라 일종의 지적인 궁금함이었으며, 게다가 그녀의 놀라운 재치를 적용하기에 딱 알맞은 수수께끼이기도 했다. 그러나 암이 그녀의 몸을 갉아먹기 시작하고, 죽음이 보다 더 본질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아삽처럼 비비안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결국 그녀는 아삽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인간의 지혜 또는 재치(wit)야 말로 죽음에 대한 가장 비참한 준비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지혜는 고통이 없고 번영으로 가득 찬 현실이야 말로 좋은 삶의 가장 확실한 표시이자, 동시에 좋은 죽음에 대한 가장 순수한 약속이라고 말한다. 물론 건강과 세상의 성공을 바라는 건 본질적으로 전혀 잘못된 게 아니다. 이러한 축복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문제는 시편 73편에 등장하는 악인처럼,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더 갈망할 때 발생한다. 아삽의 지혜가 그에게 하나님의 면전에서 피하라고 말했을 때, 그는 그것을 거절하고 대신 고통과 당혹함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왔다(17절).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주시는 주께서는 또한 빼앗을 수도 있음을 아삽은 깨달았다(욥 1:21). 사악한 자들에게 이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그들이 이 땅에서 누렸던 축복과 함께 언젠가는 “순간에 황폐하게 될 것”(19절)을 의미한다. 갑자기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하나님은 일어나서 “그들을 파멸에 던지시고”, 또 그들은 “완전한 공포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18-20절).죽음으로 이끄는 평안‘위트’ 속 중요한 한 장면에서 비비안은 그녀의 교수였던 애쉬포드(E. M. Ashford)와의 대화를 회상한다. 그는 비비안에게 존 던(John Donne)의 시(sonnet) “죽음아, 교만하지 마라”에 대한 논문을 다시 작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처음 논문에서 비비안은 세미콜론과 느낌표를 사용하여 존 돈의 “생명”과 “죽음”에 대한 분석을 어색하게 병치하는, 달리 말해 “엉터리로 구두점을 남용하는” 방식에 의존한 것 같다. 올바른 버전을 통해서 이 극적인 구두점은 단순한 쉼표로 대체된다. “그리고 죽음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죽음은 죽을 것이다.”“죽음은 이제 더 이상 무대 위에서 느낌표를 붙여서 연기해야 하는 게 아니야.” 애쉬포드는 말한다. “단지 호흡일 뿐이야. 삶과 삶을 영원히 구분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쉼표라는 거지.” 그러나 비비안은 여전히 지적 게임에만 몰두하고 있다. “그럼 재치가 중요하군요!” 비비안은 말한다. 그런 그녀에게 애쉬포드는 이렇게 주장한다. “베어링 양, 재치가 아니야, 중요한 건 진리야.” 죽음은 실로 인간의 호흡처럼 순간에 지나가는 것이다. 시편 73편에 나오는 악인처럼, 많은 사람들은 죽음이 쉼표가 아니라 마침표, 확실한 중단(hard stop), 삶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문단의 마지막 결말이라는 확신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견디고 있다. 죽음에 대한 이런 믿음을 붙잡은 사람들은 그 어떤 어리석은 신이나 최후의 심판도 기다리지 않는다는 안도감을 가지고 스스로 선택한 인생을 살다가 평화롭게 죽을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이 하나님의 보좌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게 사실이라면, 사악한 자들이 임종시에 느끼는 안도감은 평안의 표시가 아니라 마비의 증거가 된다. 자기도 모르게 뱀에게 물려서 마비된 사람처럼, 악인은 치명적인 독이 지금도 자신의 혈관 속을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번영하던 악인이 평화롭게 죽을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평화는 끝없는 죽음으로 이끄는 일시적인 평화일 뿐이다. 영원한 멸망이 악인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아삽은 단 한 순간도 이 땅에서 행복한 악인을 부러워하지 않았다(21-22절).생명으로 이끄는 고통‘위트’의 이야기는 이제 비비안이 받은 항암 치료가 그녀를 일종의 구원으로 이끌어가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암에 걸리기 전 비비안은 비할 데 없는 재치를 통해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런 성공은 그녀로 하여금 자신만을 의지하게 만들었고 또 오만한(highbrow) 자만심으로 타인과 거리를 두는 관계의 단절로 이어졌다. 그러나 항암 치료가 끝날 무렵, 비비안은 그토록 자신하던 재치에 대한 확신은 떨어지게 되고, 오히려 별로 배운 거 없는(lowbrow) 간호사 수지를 어린 아이처럼 의존하게 된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는 어린아이처럼 바뀐 그녀의 변신이 완성된다. 애쉬포드 교수가 방문해서 존 던을 읽어주겠다고 말했지만, 비비안은 거부한다. 이 장면은 그녀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바로 그 순간에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 내내 붙잡고 있던 번영의 수단을 거부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대신 애쉬포드의 품에 안긴 비비안은 늙은 교수가 읽어주는 동화책을 듣는다.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집에서 도망칠 것을 꿈꾸는 새끼 토끼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생각을 알아챈 엄마 토끼가 새끼 토끼를 끝까지 쫓아가겠다고 말했을 때, 새끼 토끼는 이렇게 대답한다. “에이, 그냥 지금 있는 곳에서 엄마의 새끼 토끼로 사는 게 낫겠다.” 애쉬포드 교수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 이야기, 우리 영혼에 대한 우화 같지 않아? 우리의 영혼이 어디에 숨어있든지 하나님은 반드시 그 숨은 영혼을 찾아내시거든. 안 그래? 비비안?” 비비안은 교수의 말에 동의하는 마지막 한 마디를 내뱉는다. 아삽도 그 말에 동의할 것이다. 그는 잠시 무식한 동물처럼 행동했지만(22절), 또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칠 생각도 했지만, 그는 하나님이 결코 그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기뻐했다(23절).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가 가져다주는 세 가지 유익을 생각했다. 하나님은 (1) 아삽을 그의 손으로 지키신다, (2) 아삽의 길을 인도하신다, 그리고 (3) 아삽이 죽을 때 그를 당신의 영원한 안식처로 맞아주신다(23-24절). 헤아릴 수 없는 이런 축복을 자신의 힘과 지혜만 믿고 사는 가난한 악인과 비교해보라.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지혜만으로도 번영하는 삶과 평화로운 죽음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무덤 너머에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실로 비참할 정도로 인간의 지혜는 부족하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다가 죽은 이들은 죽음이라는 짧은 잠을 자고 지옥에서 깨어났을 때,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그들의 소망이 마침내 영원토록 이뤄졌다는 사실을 똑똑히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비교를 하고 나서야 아삽은 자기가 처한 상황이 한때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쁨을 느낀다. 오히려 반대로, 그를 슬프게 만들었던 고통은 오히려 새로운 종류의 축복인 것으로 밝혀졌는데, 하나님은 고통이라는 도구를 통해 하나님이 아닌 인간을 의지하는 처참한 구덩이에서 아삽을 들어올림으로 오로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생명과 지속적인 만족을 알도록 하신 것이다. 감사함에 넘쳐서 그는 이제 이렇게 선언한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25-26절). 고대 희곡 작가인 아이스킬로스(Aeschylus)는 이렇게 말했다. “번영 속에서 삶을 마친 사람에 한해서만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다.” “번영(prosper)”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따라 이 말은 사실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아삽이 배운 것처럼, 우리는 그 번영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인간의 지혜와 재치를 감히 믿지 않는다. 인간의 지혜와는 달리 좋은 삶과 좋은 죽음은 악인이 누리는 평화로 정의되지 않으며, 의인이 견디는 고통 때문에 부정되지도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외부 상황과 관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27절)은 가장 끔찍한 고통이고,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28절)은 가장 고귀한 번영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죽음 이후에도 바뀌지 않는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Good Death in Psalm 73번역: 무제
신학
구약
시편73편
죽음
아삽
고통의의미
천국과지옥
악인의번영
하나님의임재
하나님의 섭리를 믿습니까?
by 이승구
2020-09-27
하나님의 섭리는 온 세상을 창조하신 “선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후에 그것들을 우연이나 운에 맡겨두신 것이 아니고, 그의 거룩하신 뜻에 따라 온 세상을 인도하시고 통치하셔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이라도 하나님의 질서 있는 관여 없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는” 일이다. 성경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다 이런 의미의 섭리를 믿어야 한다. 이런 성경적 섭리 이해는 기본적으로 몇 가지를 배제한다.성경적 창조와 섭리 이해를 가질 때 배제되는 사상들첫째로, 이 복잡한 세상이 그저 있게 되었고, 이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없다는 무신론이 배제된다. 성경적으로 판단할 때, 하나님이 없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자들의 생각과 말일 뿐이다(시 14:1). 이 세상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무신론적인 생각을 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들은 이 세상이 말하는 “합리적”이라는 말이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적으로 조정된 합리적인 판단에 의하면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롬 1:20)라고 한다. 그러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는 바울의 말이 심각한 말이다. 결국 모든 문제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롬 1:28). 사실 여기서 “마음에”라고 번역된 말은 우리 말 성경 난하 주에서도 잘 밝히고 있듯이 “지식에”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일반적인 것이다. 그러니 “지식에서 하나님을 분별하거나 인정하거나 생각하기를 싫어하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1장 28-32절 말씀은 이론적 무신론과 실천적 무신론이 인간의 모든 악의 근원이 됨을 잘 지적하고 있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둘째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으나 그 후에는 그 피조계를 그냥 내어 버려두셨다는 생각이 배제된다. 특히 물론 그 이전에도 비슷한 생각이 있었으나 17세기 말에 시작해서 18세기에 만연해 나간 소위 이신론(理神論, deism)이 배제된다는 말이다. 록크(John Locke)와 뉴톤(Isaac Newton)의 영향을 받아 출현한 이신론은 영국의 콜린스(Anthony Collins), 미들튼(Conyers Middleton), 톨랜드(John Toland), 틴달(Matthew Tindal), 쳡(Thomas Chubb), 그리고 울스톤(Thomas Woolston), 허버트(Lord Herbert of Cherbury), 프랑스의 볼테르(Voltaire), 독일의 라이마루스(Hermann Samuel Reimarus), 렛싱(Gotthold Lessing), 그리고 칸트(Immanuel Kant), 미국의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워싱턴(George Washington), 제퍼슨(Thomas Jefferson), 그리고 페인(Thomas Paine) 등이 그 대표자들이다. 대개 기독교권(Christendom) 안에서 자라나서 하나님과 그의 창조를 아주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 사람들 가운데, 창조 이후에는 일종의 자연 법칙이 주어져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 자연 법칙에 따라 돌아가는 것이지 매순간 하나님께서 관여하시는 일은 없다는 생각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이런 생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아이작 뉴톤(Isaac Newton, 1642-1727)이라고들 논의합니다), 이런 것이 구체화된 것이 이신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자연적인 과정을 중요시 하니 이를 자연신론(自然神論)이라고도 한다. 성경을 따라서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는 합리성(그러므로 잘못된 합리성)을 따라서 생각하다가 나타난 잘못된 생각이다. 이신론의 아이러니는 섭리는 부인하는 사람들이 창조와 창조자의 의도와 그 창조자의 존재는 인정하고 변호한다는 것이다. 대개 이신론은 초자연을 거부하면서 자연만을 인정하는 자연 종교(natural religion)와 구속과 이적과 기도 등을 거부하고 도덕률 중심으로 종교를 이해하는 도덕 종교(moral religion)를 참된 종교로 제시하려고 했다.셋째로, 이 세상이 신과 동일시 될 수 있다는 고전적 범신론(汎神論)과 이 세상의 과정이 하나님의 전개 과정이라는 헤겔적인 범신론, 그리고 이런 생각들에 대한 많은 공격과 비판을 감안하면서 근자에 나오는 이 세상의 과정이 하나님 자신은 아니지만 이 세상의 전개 과정 중에서 신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만유재신론(萬有在神論) 또는 범재신론(汎在神論)이 배제된다. 근자의 만유재신론은 이 세상에 넓게 퍼진 생각이고 점점 더 영향력을 확대해 가기에 우리의 주의를 요한다. 참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성경적으로 믿는 사람은 만유재신론적 생각을 할 수 없다.성경적 섭리론의 의미이런 잘못된 사상들이 배제되고 성경이 말하는 대로 나아갈 때 우리는 다음 세 가지를 말하게 된다.첫째로, 창조 이후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보존하심을 인정해야 한다. 한순간도 하나님께서 보존하지 아니하시면 이 세상은 존재할 수 없다.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히 1:3)라는 이 말씀의 의미를 잘 생각해야 한다. 매순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유지된다. 한 순간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붙드시지 아니하시면 이 세상은 사라진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시편 기자와 같이 다음 같이 말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 샘을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각종 들짐승에게 마시게 하시니, 들 나귀들도 해갈하며 공중의 새들도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귀는 도다. 그가 그의 누각에서부터 산에 물을 부어 주시니 주께서 하시는 일의 결실이 땅을 만족시켜 주는도다”(시 104:10-13). 이 하나하나가 다 하나님께서 보존하시므로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스스로 존재하거나 유지해 갈 수 있는 것은 없다. 바울이 이테네의 아레오바고에서 선언한 바와 같이, 우리들도 “우리가 그를[즉, 하나님을]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 17:28)고 해야 한다.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과정을 그저 보존하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정하신 목적지로 이끌어 가시고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모든 것을 통치하고 계심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대로 온 세상을 통치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분이시다(엡 1:11). 온 세상이 그의 기쁘신 뜻대로 통치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이것을 “권능의 왕국”(regnum potentiae)이라고 해왔다. 이 세상의 되어지는 모든 일은 숨겨져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 그래서 옛날에 이것을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표현한 적도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참으로 인정해야 한다.결국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 가운데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을 위해 온 세상을 통치하신다. 그것을 에베소서에서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엡 1:10)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것이 궁극적 목적이기에 이 목적을 이루시려는 그 계획은 이미 창세전부터 있었던 것이다(엡 1:3). 이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이고, 그 경륜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이 세상의 역사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이 목적을 떠나서 발생하지 않는다. 우리로서는 그 모든 것을 능히 다 미루어 살필 수 없지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엡 1:11).셋째로, 때로는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하시지만, 대개는 이 세상의 과정과 함께, 그러므로 소위의 제2의 원인들(causa secunda)과 함께 섭리가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즉 비상섭리와 일상적 섭리를 모두 다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의 직접적 역사를 비상 섭리(extra-ordinary providence), 즉 이적이라고 한다. 이것을 부인한 것이 앞서 말한 이신론이나 이신론을 향해 나가는 생각들이다. 필요하면 제2의 원인이 없이 또는 이 세상의 일상적 과정에 역행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하실 수 있다. 예수님의 경우를 보면 아버지가 없이도 마리아에게 수태되도록 놀랍게 역사하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과 사도들의 놀라운 이적들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일어날 수 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시느냐에 달려 있다. 이적은 우리의 필요나 우리의 열심이나 우리의 노력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시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이런 비상 섭리(非常攝理)를 제외하면 구체적인 과정이 이 세상의 제2의 원인들과 함께 일어나는 것이다. 이를 일상적 섭리(日常攝理, ordinary providence)라고 한다. 그러므로 성경적 입장은 제2의 원인을 배제하지 않는다. 우리 부모님이 있어야 우리가 태어난다. 우리의 존재에 있어서 부모님이 제2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이적도 제2의 원인을 사용해서 일어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홍해를 가르신 사건도 다음과 같이 일어난 것이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출 14:21). 그러니 비상섭리가 아닌 일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우리는 잘 알 수 있다.섭리를 참으로 믿는가?이제 중요한 것은 이런 섭리를 과연 믿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가 없이는 그 어떤 일도 일어 날 수 없다. 그러므로 섭리를 참으로 믿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섭리를 참으로 믿는가에 달려 있다.이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섭리하심을 믿어야 한다. 사실 모든 것이 잘 될 때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고 믿는다고 하기는 비교적 쉽다. 물론 그런 순경(順境)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부인하는 이신론적 사고가 나타나고 한 것을 보면 순경 가운데서도 섭리를 믿고 말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그런데 지금과 같은 역경(逆境) 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를 말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믿음의 행위이다. 우리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고 한 선배들처럼 우리는 모든 정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면서 그 안에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의존해 가야 할 것이다. 여기에 신앙이 있다. 이 상황이야 말로 참으로 우리의 믿음이 있는지 없는 지가 드러나는 위기(crisis)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위기는 종국적인 위기(the final crisis)를 바라보며 우리에게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위기”라는 말이 “판단하다, 심판하다”라는 뜻을 지닌 헬라어 “크리노”에서 왔음을 잘 생각하면서 이 위기의 순간에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을, 하나님의 섭리를 믿음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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